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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받으신 예수님 임동락 202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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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 받으신 예수님           본문 53:1~3

 

오늘 말씀에서 이사야는 연한 순 같으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본문1절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라고 묻습니다. 이제껏 우리가 전한 것이 무엇입니까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도 이사야는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연속해서 증거합니다. 이 시간에 고난 받는 종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만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2절 말씀 전반부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합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연한 순은 새싹 같다는 말입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조경수를 보면 댕강 가지를 쳐내어 몸통이 훤히 드러나 있습니다. 잘린 나무는 겨우내 추위에 시달리다가 봄이 되면 그 몸통에서 새싹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새 생명이 움터 나옵니다. 처음 보기에는 전혀 영향력이 없어 보이지요. 이처럼 우리 예수님의 탄생이 바로 연약한 새싹 같습니다. 만 왕의 왕 메시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으리으리하게 천사들의 영전을 받으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초라하게 베들레헴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난 받으신 예수님이 그의 백성을 천국백성 만들기 위해서 이 땅에 연한 새싹 같은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윗 왕의 후손이라 하여 왕의 지위에서 황금 마차를 타고 창검을 든 병사들을 거느리고 구원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로마에 망해버린 나라에서 아무런 힘도 없이 돈도 없이 연한 순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연한 순이 마침내 구원 사역을 다 이루신 줄 믿습니다. 19:30이지요.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2절 후반부에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마른 땅에서 밖으로 삐쳐 나온 뿌리 같으신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푸른 잔디밭이 아니라, 황량한 광야에 뿌리를 훤히 드러낸 볼 품 없으신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역은 꽃 길이 아닙니다. 대국의 왕자처럼 멋진 옷을 입고, 폼 나게 살다 가신 것이 아닙니다. 가시밭길을 걸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지금처럼 살기 좋은 시대에 선진국 대통령이나 부유한 나라의 왕자로 오셨다면,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을 당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하등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만일 그런 예수라면 안 믿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못 배운 사람을 위하여, 불행한 사람,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 고난 당하는 사람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모습은 성화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미남이 아닙니다. 보통의 남자였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이 젊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한가한 날에 시골길을 걷고 있는데, 한 농부가 말을 몰아 쟁기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링컨은 농부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때 링컨은 말 엉덩이에 파리가 붙어 있는 걸 보았습니다. 파리가 말을 귀찮게 하는 것을 담박에 알 수 있었습니다. 링컨은 그 파리를 쫓아버리려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농부가 링컨을 말리며 말하기를, “그만 두세요. 그 파리 때문에 이 늙은 말이 그나마 움직이고 있답니다.”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파리처럼 나에게서 쫓아내거나 털어내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또는 그런 일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편과 고난이 내 삶을 윤택하게 합니다. 어느 정도의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숙하게 하는 자극제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고난을 극복하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곧 말씀을 통하여 주는 분별력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할 일이 무엇인가요? 세상에서 고난 당하는 사람을 찾아서 그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는 것이 이 땅의 교회들이 할 일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고난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리세인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닙니다. 8: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예수님을 힐난하였습니다. 또한 만만하게 보고 시험하였습니다. 고난을 받으시고 옷이 벗겨집니다. 19: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곱게 차려 입은 것이 아니라 헐 벗겨지고 수치를 당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가 이렇게 고운 모양도 없이 옷 벗겨 질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예수님에 초림에 대한 이 말씀을 이사야 53장이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른 땅에 뿌리처럼 볼 품 없이 오신 것은 우리가 수치를 당치 않게 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다시 말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마른 땅의 뿌리 같이 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 성도들은 마른 땅의 뿌리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주님 재림하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3절 말씀 다같이!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예수님은 버림 받으셨습니다. 이사야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사야는 B.C 742 20세 때 예언자로 부름 받아 예수의 탄생을 처음 예언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독생자입니다. 메시야입니다. 구세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메시야가 세상에 오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요란하고 화려하고 웅장한 가운데 떠들썩하게 세상에 왔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전혀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세상에 태어나실 때의 모습을 미리 예언한 내용입니다. 그는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고” “모양도 없고” “멸시를 받고 버림받고 귀히 여김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세상에 태어나시는데 사람들의 기대와 상상을 무색하게 너무나 조용하게 아무도 모르게 오셨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집으로 오셔서 공생애 동안 목수의 아들이었다고 무시당하시다가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또 땅에 묻히는 수모를 당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시는데 그렇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구속의 의미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축소하고 인간 수준으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인간이 하나님을 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음식점에 가면 주문 받을 때 좀 세련된 음식점에서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주문을 받습니다. 그것은 주문자와 손님과 눈높이를 같이 한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상대방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배려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시는 이유는 손이 모자라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을 나누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베풀려고, 나누려고, 사랑하려고, 도우려고, 길을 안내하려고 부르십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셔서 은혜를 주시며 뜻을 펼치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자격이 있어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있어서 부르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창조적인 부르심 입니다. 불러서 새롭게 창조하시고 능력을 주시려고 부르십니다. 그렇게 불러서 우리로 하여금 창조적 삶을 살게 하시고 할 일을 하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펼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시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마다 사람을 차별하고 나누어 생각하는 못 된 폐단이 있습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도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하는 생각이 주님을 괴롭게 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악습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성도는 동등합니다.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월의식, 차별의식 버려야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삽니다. 상대를 비하하지 맙시다. 그래야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도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즐겁게 주님을 따라 갑시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은혜와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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